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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5 琦君의 <橘子紅了>를 읽고
중국의 현대소설을 아직 많이 읽어보지 못한 나에게 琦君은 낯선 이름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조용한 밤, 나는 수업시간에 받은 그녀의 원고를 펴고 금세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소설을 보는 내내 진짜 秀娟이 된 것 마냥 秀芬과 함께 하는 듯 했고, 그녀의 불운한 일생에 비통해했다. 소설 중의 秀芬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고, 나이 많은 낯선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불운한 여자이다. 처음에는 그녀가 이해 안 가고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大妈의 大伯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에도 싫증이 났고, “正派人”이라고 묘사되는 “正派人”답지 않은 大伯의 이기적인 행동에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가장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琦君이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그녀가 묘사한 大妈는 자애로운 부인이지만 남편의 사랑을 평생 갈구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형 여자였고, 大伯 역시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작가의 부모님으로 부터 봐왔던 이야기가 소설의 소재가 된 데에 그 영향이 있겠지만, 나는 내심 작가가 좀 더 秀芬의 입장에서 글을 써주길 바랬나보다. 秀芬은 왜 그다지도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을까? 책 중 六叔가 말한“世上有很多无奈的事"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에는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매우 많다. 과연 그럴까? 秀芬이 만약 大妈를 따라가지 않고 또 다른 자신의 삶을 선택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스스로조금만 용기와 자신을 갖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운명과 적극적으로 맞서고 도전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권이 많이 신장되어 남녀평등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의 시대에도 어떤 여성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또 사회 곳곳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렇듯 여성들의 생각과 정신이 완전히 바뀌고 단결되지 않고서는 언제 어디서든 남자와 평등한 대우를 보장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실존 인물일지 모르는 秀芬이 살던 당시의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金瓶梅>나 <红楼梦>과 같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남존여비의 구사상들이 <橘子紅了>에도 드러난다. 여성을 성과 놀이의 기구로만 여기고 많은 처첩들을 거느리며 살아갈 수 있었던 명, 청대의 사회풍조가 중국에서는 고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렇게 뿌리 깊은 전통사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존재했다. 조선시대 가문을 이어야 하는 일이 중시 되어 당시에도 비인간적인 씨받이로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존재했고 작품으로도 탄생했지 않은가. 안타깝지만 그 작품을 보지 못해 감히 비교는 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모든 일들이 남자의 손에만 좌지우지되던 사회는 이제 과거로 묻어두어야 한다. 秀芬과 같은 불쌍한 피해자가 다시는 없어야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자신의 大伯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지 존경인지 헷갈려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후에 진실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시대의 피해자 秀芬. 전통적인 사회와 환경에 억눌려 비정상적인 사랑을 하고, 남편의 마음을 갖지 못해도 화를 내지 않고 묵묵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大妈. 비참한 두 여인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마음이 왠지 모르게 무겁고 쓸쓸해졌다. 게다가 琦君의 완곡한 묘사방법과 필체가 비극성을 더욱 극대화 시키고, 나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해 분노케 한다. 노랗다 못해 붉어진 귤이 만발하는 정원에서 大妈가“橘子一天比一天红了,大伯该回来了”하는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도는 듯하다. 魯迅의 <阿Q正傳>을 읽고
2007년 북경에 있는 한 중국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 아주머니 책장에 있던 수많은 책들 중에 鲁讯의 소설집이 있었다. 그 중 제일 먼저 읽은 <狂人日记>는 그 자리에서 책장을 다 넘겨 볼 정도로 흥미로웠다. 중간 중간에 모르는 글자도 많았지만 백화로 쓰인 소설이라 고문을 읽는 것 보다는 쉬웠다. 鲁讯의 문체는 평범하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고 또 강렬하다. 책 중에 정신병 환자로 묘사된 狂人을 통해 작가 鲁讯은 당시 중국사회의 무서운 단면을 폭로하고 있었다. 이는 또한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편견과 일치했다. 사람을 먹는 중국인들의 야만성은 옛날부터 익히 들어오던 풍설이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이었단 말인가? 鲁讯은 선각자이다. 그는 자기가 살던 당시 몸소 체험하고 느낀 중국사회의 병폐를 문학을 통해 무지한 중국 대중들에게 알리고 깨우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혁명가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도를 한 문학뿐 아니라 중국인들의 사상을 혁명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구하라......"하고 맺는 狂人日记의 끝부분을 보고 나는 한동안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鲁讯의 혁명적인 정신은 그 후에 쓰인 <阿Q正传>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阿Q를 통해 鲁讯은 중국 농민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그래서 어렵고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낙후된 인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병폐한 사회와 국민을 의사가 아닌 문학가로서 직접 치료하고자 한 것이다. 阿Q는 실로 중국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소설 속에서 나타난 阿Q의 정신 승리 법은 나로 하여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중화사상에 흠뻑 취해 대국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중국인들을 우리는 21세기인 지금에도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때는 鲁讯의 소설이 나온 당시 문맹이 많아서 아직까지 문명의 발전이 더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鲁讯의 소설을 보고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 몇몇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와 반대로 鲁讯의 심중을 깨우치고 여기저기서 분투하고 세계도처에서 활동하며 중국을 변화 시키고 있는 자들도 있다. 그리 하여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는 "긴급출동sos"라는 프로에서 노예할아버지에 대해 방영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노예 할아버지는 주인이라고 부르는 자기보다 젊은 남자에게 50년간 갖은 학대와 부림을 당하며 살아왔다. 나는 당시 그를 보고 한참을 눈물 흘렸다. 그런데 며칠 전 교실에서 阿Q정전 영화를 볼 때 자연히 그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阿Q와 같은 정신적 승리법이 있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학대받으며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농민의 고난, 비참함, 우매하고 낙후된 인생을 鲁讯은 阿Q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면 이 할아버지는 실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한국의 현대판 노예였다. 할아버지가 왜 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비참한 삶을 살아와야만 했을까? 그는 무지했다. 자신이 부림당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자신에게 보통사람들과 같은 인권이 있는 줄 모르고 평생을 바보같이 살아온 것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소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우리나라에 이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충격이었고 또 답답해졌다. 그가 마지막에 병원에 돌아와 치료받고 가족을 만났을 때 보인 웃음은 내 마음을 찢어지게 했고, 阿Q가 죽기 직전 "살려줘!" 라고 외쳤을 때 느낀 것과 같은 묘한 통쾌함 마저 들었다. 문학을 통해 노예할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鲁讯이 일본에서 중국인이 총살당하는 영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가 의학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마음을 한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施耐庵의 《水浒传》을 읽고이번에 수호전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교수님께서 처음에 제시하셨던 네 가지 질문에 초점을 두었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첫 번째 질문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108명의 인물을 과연 도적으로 보아야하는가 아니면 영웅으로 보아야하는가이다. 둘째는, 수호전이 아직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이고 셋째는, 108인의 도적 혹은 영웅, 그들이 왜 양산박(梁山泊)으로 모였는지 하는 점이고 넷째는, 삼국지와 수호지에서의 충의(忠義)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물음이다. 지금부터 수호전을 읽고 난 후 최종적으로 도출해 낸 답을 정리해 보려 한다. “(替天行道)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 108명의 호걸들이 양산박(梁山泊)에 집결해 한 맹세이다. 나는 수호전을 읽고 난 후 과연 이들이 저지른 일들이 감히 하늘을 대신해도 될 만큼 정당한 일이었는지 의문이 간다. 누구의 입장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고 이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당시 송나라 정부 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단지 살인이나 범죄를 저지르고 어쩔 수 없이 도피해 간 도적들 혹은 정부세력에 반대해 스스로 양산박(梁山泊)이라는 요새에 모인 도적들이라고 여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전사부 태위 고구(高球)와도 같은 썩은 관리 아래에서 핍박받으며 생활하던 당시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랑자 몰모대충(沒毛大蟲) 우이(牛二)를 죽인 청면수(靑面獸) 양지(楊志)나 괴롭힘 당하던 부녀를 위해 백정을 죽인 화화상(花和尚) 노지심(魯智深)이 당대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럼 중국인들은 이들108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먼저 중국 친구들에게 이들을 영웅으로 생각하는지 도적으로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서슴없이 그들을 영웅이라고 대답했다.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을 108인의 호걸이라 칭하며 나라를 위해 혁명적 농민봉기를 일으킨 장군들로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굉장히 놀랐다. 갖가지 개성 있는 인물들과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전개는 나를 충분히 소설에 매료시켰지만, 삼국지와는 또 다른 전반부의 무수하고도 사실적으로 그려진 살인 이야기는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수호전 영웅의 본질에 뿌려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내용은 잔인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정의감이 넘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런 자도 많다. 그래서 못된 짓을 일삼는 탐관오리의 횡포로부터 백성을 구제하고, 간신들로 들끓는 당시의 조정을 구하기 위해 의적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적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고, 의협심을 가장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다. 이러한 도적들도 과연 영웅으로 볼 수 있을까? 최소한 나의 관점에서 이상화된 영웅은 이렇게 극악무도하고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이들을 모두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누구보다 나를 크게 실망시켰던 사람은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였다. 직선적이고 성품이 불같은 그의 캐릭터는 때로는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주동(朱仝)이 뇌횡(雷橫)을 호송하다 풀어준 대가로 창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가 뇌횡, 오용(吳用)과 함께 꾀를 짜 당시 주동이 돌보고 있던 교도소장의 아들을 죽였다. 그들은 비록 주동을 양산박으로 데려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내가 볼 때 명백히 ‘의(义)를 가장한 무분별한 살인' 이었다. 송강(宋江)이 염파석(閻婆惜)을 죽인 것도 그렇다. 난 처음에 의협심 있고, 평소 여자를 너무 가까이 하지 않고, 재산도 탐하지 않으며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송강을 산동의 진정한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압사로 지내던 그가 양산박 도적들과 내통한 증거인 조개(晁蓋)의 편지를 염파석에게 들켜버리자 그녀를 단칼에 죽인다. 죽이고 나와서 장례치를 돈을 염노파에게 주고 마땅히 벌을 받게 되어 유배를 떠나지만, 아무리 염파석이 악역이라고 한들 첩이었던 여자를 단번에 살인하는 것을 보고 섬뜩했다. 또 장문원(張文遠), 장단련(張團練)에 복수하기 위해 갔다가 그 장소에 있었던 아무 죄 없는 시녀와 시종까지 단번에 찔러 죽이는 무송(武松), 게다가 피를 묻혀서 벽에 ’살인자는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이다‘라고 번듯이 쓰는 그 장면은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생생히 눈앞에 그려지는 무송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그 밖에도 모르는 사람에게 독을 탄 술을 먹여 살해한 후, 사람고기를 만들어 만두를 파는 주점 주인 이야기도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논리는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이들의 이러한 살인은 의(义)라는 명분하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그들을 영웅이라 하지만 영웅적인 모습 가운데 보이는 섬뜩하고 비윤리적이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야기 전개를 보면, 나는 아직도 그들이 영웅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모택동(毛澤東)이 한 말이 생각난다. "(读不完水浒传的不是中国人)수호전을 다 읽지 않으면 중국인이 아니다." 이렇듯 중국에서 수호전은 4대기서(四大奇書)중의 하나로 고전소설의 확실한 위치를 잡고 있다. 그럼 왜 이렇게 잔인하고 난폭한 도적들의 이야기가 유독 널리 사랑받으면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삼국지에 못지않게 수호전이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우선, 수호전은 옛날부터 민간에 유행하던 이야기를 시내암(施耐庵)이 종합해 엮은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소설 속에 민중들의 생각이 묻어나고, 그들의 사상과 희망이 반영되어 있어 대중들 역시 소설을 볼 때 더 친근하고 익숙하게 느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수호전에 나오는 108인을 호한(好漢)이라 칭하며 수도 없이 이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며 자란다. 그래서 중국인들 머릿속에는 이들이 위대한 영웅이라고 깊게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살인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도 중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것이고, 도적들 모두 각각의 이유로 부득이하게 양산박으로 하나씩 집결하게 된 것이라 주장한다. 예를 들면, 중국인들은 옛 부터 무송(武松)이 본래 정직하고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가 바람난 형수 반금련(潘金蓮)과 서문경(西門慶)을 처참히 죽였을 때, 마땅히 법에 따르자면 이도 역시 살인에 해당하므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현 지사(縣知事)는 오히려 무송의 죄를 가볍게 고쳐 집행한다. 만약 현지사가 사형을 선고했다면 주위의 원망이 모두 현 지사에게 향했을 것이다. 무송은 본래 인간됨이 바르고 착한 영웅적 인물로 묘사돼왔기 때문에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만약 여기서 무송이 법에 의해 사형으로 집행되었다면 독자들의 흥미도 같이 떨어졌을 것이다. 수호전을 읽으면서 이야기 전개 과정 중 곳곳에서 중국인 민중의 염원과 이상이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호전이 민중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전해 내려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둘째로, 수호전의 빼어난 인물과 성격묘사이다. 수호전에는 그야말로 복잡하고 다양한 인물이 출연한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내가 수호전을 볼 때, 인물 하나하나 인상이 뚜렷하고 각각의 캐릭터가 확실해서 전혀 헷갈리는 일이 없었다. 그 중에 호보의(呼保義) 송강(宋江), 지다성(智多星) 오용(吳用), 표자두(豹子頭) 임충(林沖), 구문룡(九紋龍) 사진(史進), 미염공(美髥公) 주동(朱仝)등의 인물들은 송사(宋史)에도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수호전을 보면서 나름대로 이들의 이미지를 상상해왔었는데 실제로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내심 궁금해진다. 수호지는 거침없고 힘 있는 필치, 풍부한 색채와 어휘로 사실적으로 인물을 묘사해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빠져들게 한다. 인물 또한 상층관료부터 하층까지 다양한 계급이 등장한다. 시진(柴進), 송강(宋江), 임충(林沖)과 같은 자들은 귀족이나 지주 출신 또는 봉건 정권을 섬기는 관료들이었고 그에 반해 노지심(魯智深), 이규(李逵), 무송(武松) 등은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대중들은 이 많은 108명의 인물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이나 이상적인 영웅 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을 보면서 그들을 관찰하니 내용전개가 자연히 흥미진진하게 느껴지고 더 나아가 이 영웅들을 위해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수호전을 읽고 여자 친구들과의 의(義)와는 전혀 다른 남자들 간의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두터운 의(義)에 감동했다. 의를 재물이나 자신의 목숨보다 중시하는 인물을 보면 늘 감탄과 찬사해 마지않았다. 항상 호걸 사귀기를 좋아하고 호걸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자신은 곤장을 맞아 가면서도 의(義)를 지키려 했던 귀공자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 팔십만 금군의 사범표자두(豹子頭) 임충(林沖), 형을 끔찍이 섬기고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반금련과 서문경을 응징하는 행자(行者) 무송(武松), 솔과 고기를 좋아하고 호탕하며 거질기도 하지만 약자를 도울 줄 아는 정의로운 남자 화화상(花和尚) 노지심(魯智深)까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 이들 모두가 충의(忠義)로 단결하여 당시의 백성들과 약한 사람들을 위해 부정한 세력에 맞서 반항하는 피 끓는 정의의 사나이들 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도 과연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의(義)를 쫓는 자를 만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이러한 인물들이 과장되고, 완전히 재구성된 허구라 해도 사람들은 소설을 보고 또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줄거리 전개에 따라 흥분하고 열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셋째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도 작품을 흥행하게 한 요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남송부터 원나라 말까지 중국은 북방민족에게 끊임없이 시달렸고, 결국은 중원을 몽고족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상황에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도적이 되는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자연히 민중들은 당시 양산박의 도적들이 영웅으로 보였고, 그들의 입을 통해 또 영웅적인 면모가 더욱 부풀려 졌을 터이다. 송조의 무능한 정권을 바라보다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더 나은 세계로 향한 염원은 저절로 양산박의 108명 호걸들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로, 수호지는 대부분이 허구를 가미해 내용상의 재미를 더한 것이고, 과장된 문체를 사용해 중국인들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장 기초적 근간은 물론 역사서에 두고 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여기에 더 부풀려지고 과장되고 새로 꾸며진 그런 이야기가 훨씬 많다. 삼국지보다 역사적 사실에 구애받지 않았고, 통쾌하고 호탕한 필체로 본격적인 소설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바로 백성들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게 해 준다. 또 수호전을 읽다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인들 특유의 과장적인 문체로 쓰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경양강에서 술 취한 채 호랑이를 때려잡는 무송 이야기, 축지법을 써서 하루에도 천리이상을 간다는 대종 등등 말이다. 이렇듯 내용과 문체방면에 본격적인 소설화가 이루어져 재미를 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108인의 도적이 양산박(梁山泊)에 모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도적들의 최종 집결지이자 요새인 양산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산동성 양산현(山東省 梁山縣)에 있는 사방800리에 달하는 호수라고 한다. 이 호수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적 특색이 이들을 모여 살게 한 것이 아닐까? 아마 양산박은 죄를 지은 도적들이 관인을 피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황하강 하류에 위치한 양산의 험한 산세도 그렇고, 주위가 모두 깊은 호수여서 배를 타고 건너가지 않으면 접근이 힘든 곳이라는 점도 그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을 터이다. 주위에 갈대숲이 많아 잘 접근할 수도 없고 희미하게 보이는 양산이 관청에 반항해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전략을 짜는 데 있어 둘도 없이 좋은 장소이다. 또 제일 처음에 백의수사(白衣秀士) 왕륜(王倫)이 있던 곳이라 후에 조개와 송강으로 산채의 주인이 바뀌면서 많은 도적들이 이곳에 결집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본래부터 양산박에는 도적이 많았고 양산박의 어부들은 보통 도적 노릇을 했다는 역사서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도적들이 후에 양산박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삼국지와 수호지에서 나타난 충, 의(忠, 義) 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먼저 충(忠)과 의(義)의 정의부터 내려 보자. 충(忠)은 글자에서 보는 그대로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뜻으로 임금에 대하여, 신하와 백성 된 본분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사상이다. 자기의 조국이나 주변의 가까운 가족, 친구에게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도 충(忠)이라 할 수 있겠다. 수호지에서 송강은 많은 유혹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조국을 위해 충신 했다. 또 임충이 양산으로 간 후, 고구 아들 고공자의 계속되는 능욕에도 결코 굽히지 않다가 마지막에 목을 매 자살한 임충의 부인을 보면 이러한 태도도 바로 충(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의(義)는 무엇인가? 글자를 통해 해석해 보면 나의 마음 씀을 양처럼 착하게 가진다 라는 뜻이 합해진 글자로 ‘옳다’를 뜻하고 바르고 의로운 일을 나타낸다. 수호전의 호한들은 형제나 친구를 위해 자기의 생명도 무릅쓰고 위험 속으로 돌진한다. 이러한 행동 모두 의(義)를 위한 것이다. 포악한 관료를 없애고 선량한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해 봉기하는 것도 모두 의(義)를 위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충과 의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충(忠)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하층민에게 군주나 지배층에 복종하고 헌신할 것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지배 질서이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수호전에서의 의(義)는 억압당한 계급의 사상과 도덕관념을 주입해 봉건사회에 반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서의 충의(忠義)는 수호지에서와는 또 다른 성격을 띤다. 먼저 배경을 보면 삼국지는 후한(后漢)말기, 황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피폐해지고 황실은 외척과 환관에 의해 부패하고 있을 때, 이에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조조, 유비, 손권 등등의 영웅호걸들이 천하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게 된다. 수호지는 송나라 휘종 때 사간신(四奸臣)이 날뛰고 있을 때, 하층계급인들 또는 평민출신의 호걸들이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하늘을 대신해 악을 징벌하는 내용이다. 삼국지에서의 충의(忠義)는 주로 유비(劉備), 손권(孫權), 조조(曹操)의 조국 한실을 위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한실을 위해 충(忠)하고 의(義)를 실천한다. 이들은 전국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고 싶은 야망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즉, 삼국지에서는 황실후손의 유비가 싸움에 이겨 크게 삼국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뜻을 두었는데, 여기서 자신의 조국 한실(漢室)을 위한 마음을 큰 의미의 충의(大義)라고 한다면 수호지는 또 다르다. 수호지에서의 충의(忠義)하면 제일 먼저, 哥们之间的 忠義가 떠오른다. 108명의 호걸들은 친구간의 의협심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정의감이 강해 나약한 백성들을 위해 봉기를 일으킨다. 이 봉기는 송대(宋代)의 나라나 국가를 향한 충의(忠義)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즉 불의에 참지 못하는 호걸들의 작은 의미의 충의(小義)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충의수호지>라는 책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수호전에서 충과 의는 가장 대표적인 바탕 사상이다. 이들이 양산박에 집결해 군중을 이루게 되는 조직과 단결의 기초가 바로 이 충의(忠義)에 있는 것이다. 罗贯中의 <三国志演义>를 읽고이번 과제를 통해 다시 한 번 삼국지에 대해 고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삼국지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역사서이다. 중국 도처에서 삼국지에 대한 강의는 매번 여러 매체를 통해서 흘러나온다. 또한 중국 음식점이나 상점에 들어가 보면 실제로 관우를 신처럼 모시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지가 이렇게 환영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관중과 박종화의 삼국지연의를 읽고 그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먼저 위(魏)ㆍ촉(蜀)ㆍ오(吳) 삼국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소설화하기에 적절할 만큼 봉건사회의 역사 발전 과정 중 가장 특색이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의 역사는 서기 190년 군벌 혼전 시기부터 서기 280년 진(晉)이 멸하고 오(吳)나라가 남방을 통일할 때까지 90년 동안 이어졌다. 많은 사학가들이 삼국 역사의 시작을 조비(曹丕)가 제위에 오른 서기 220년부터로 보기도 하지만, 과학적으로 따져보자면 위(魏)ㆍ촉(蜀)ㆍ오(吳) 삼국의 형성 과정이 확실히 존재하는 서기 190년부터가 더 정확하다. 위, 촉, 오 삼국역사의 발전은 불균형 했다. 시간적으로 살펴봐도 각 나라의 유지 기간이 제각각이다. 손권(孫權)이 오(吳)나라를 건립한 시간이 가장 길었는데, 바로 서기 222년 손권이 오 왕을 청한 때부터 서기 280년 손호(孫皓)가 서진(西晋)에 항복할 때까지 모두 59년이다. 다음은 조조(曹操)의 위나라(魏)인데, 서기 220년 조비(曹丕)가 황제로 청한 후부터 서기 265년 사마염(司馬炎)이 위 원제(魏 元帝) 조환(曹奐)을 없애고 서진(西晋)을 건립할 때까지 모두 45년이다. 촉한(蜀漢)나라는 생존기간이 가장 짧다. 서기 221년 유비(劉備)가 제왕으로 청할 때부터 서기 263년 유선(劉禪)이 위(魏)나라에 의해 망하기까지 모두 43년이다. 이처럼 위(魏)ㆍ촉(蜀)ㆍ오(吳) 삼국역사 발전의 복잡하고 특색 있는 과정이 소설화되기에는 매우 적합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대의 사학가들이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을 주었다. 사학가의 입장과 관점도 달라서 누가 정통이냐 하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위를 정통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촉을 정통으로 삼았다. 물론, 진수의 삼국지 역사서는 위를 정통으로 삼았고, 내가 읽었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촉을 정통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위나라와 촉나라 간에 서로 탄병을 꾀한 사실은 확실하지만, 사실상 여러 전쟁을 통해서 그 누구도 상대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사실 삼국 간 전쟁 목적은 모두 자국의 지반을 넓히기 위해서이고, 전국의 통일 지도권을 얻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통”의 설법도 불필요할지 모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 역시 이번에 소설을 볼 때, 중립적인 견해를 가지고 보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첫째로는, 시대적인 배경 면에 있어서 삼국의 역사는 뒤섞이고 복잡했고 또 이 기간에 나타난 뛰어난 인물들과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다. 이러한 특색 때문에 삼국지라는 역사서가 소설화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또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의 배경 전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삼국은 동한 왕조에 이어서 나타난다. 동한 말년, 토지주의 횡포가 급격히 심해지고 토지 겸병 현상이 일어났으며 두 외척 집단의 정치 간섭과 상호 배척으로 인해 정치의 극단 암흑과 조정 부패가 조성됐다. 게다가 강족(姜族)의 잇따른 병사 집용과 끊이지 않는 천재지변, 첨예화 된 계급 대립 등으로 인해 마침내 서기 184년, 장각(張角)ㆍ장보(張宝)ㆍ장량(張梁)의 지휘아래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 황건적의 난은 매우 신속히 일어났으며, 동한왕조의 통치를 위협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에 당황한 한 영제(灵帝)는 황건적을 포위하기 위해 잇따라 병사를 파견했다.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앞세워 군을 이끌고 낙양 근교에 주둔하게 했고, 노식(盧植)을 하북으로 파견해 장각을 토벌하게 했으며, 주휴(朱携)ㆍ황보숭(皇甫嵩)을 영천으로 파견해 파재(波才)가 이끄는 다른 황건적을 토벌하게 했다.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진압하면서 동탁, 원술, 원소, 유비 등의 걸출한 인재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이 된다. 한(漢) 왕조의 맥을 존속하려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충돌이 바로 시대적 배경이 되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이지 않은가? 둘째로는,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 삼국의 정치ㆍ경제ㆍ군사ㆍ외교 및 문화 발전의 불균형이 소설의 풍부한 소제가 되었다. 전체로 보면 위나라가 촉ㆍ오나라보다 강세를 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매우 긴 시간 동안 오ㆍ촉 연합이 조조에 대항한다. 하지만 후에는 오나라와 촉나라가 각각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게 된다. 세부로 보면 서기 220년 오나라는 관우(關羽)와 위나라의 전투를 기회로 이용해 위나라를 급습해 결국 형주(荊州)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였다. 이 때문에 유비(劉備)는 서기 222년 직접 병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토벌하기에 이른다. 촉나라와 오나라의 군대는 이릉(夷陵)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벌였는데, 그 결과 오나라가 군대가 승리하고 촉나라 군대는 패했다. 서기 223년 유비는 피로가 쌓여 병으로 사망했다. 유비의 사망 후, 제갈량(諸葛亮)은 유비의 영령에 따라 유비의 아들 유선을 즉위시키고, ‘오나라는 위나라에 지속적으로 대항한다.’라는 원칙을 계속적으로 보급했다. 또한 북상으로 중원을 취해, 한실의 가문 대업을 다시 일으킬 것을 생각하며 많은 차례 북벌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서기 234년 촉나라 군대는 사마의(司馬懿)를 대장으로 내세워 또 한 번 북벌한다. 두 군대는 오장원(五丈原)에서 역사의 대 결전을 벌였다. 두 군대가 서로 대치한 상황에서, 섣불리 승패를 판단하기 어려운 때 촉나라 군사 제갈량이 병들어 군중에서 죽게 되자, 이로 인해 촉나라 군대는 전쟁할 힘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철군한다. 이때부터 위나라의 세력은 점차 쇠약해지고, 사마씨(司馬氏)에 의해 그 권위가 제압됐다. 사마씨의 사망 후에도 그의 두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가 계속 집정을 했고, 실권이 없는 황제는 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서기 263년 촉나라는 마침내 위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서기 265년 사마염(司馬炎)이 위 황제를 제거하고 진(晉)조정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서기 280년, 사마염은 강력한 군대를 집결시켜 건업(建業)을 공격하고, 오나라를 멸했다. 동한(東漢)이래 몇 십년동안 분열ㆍ할거한 국면이 비소로 끝나는 시점이었다. 서진(西晉)의 건립이 삼국 정족의 역사를 대체했고, 단기의 중국 통일이 나타났다. 이렇듯 삼국이 통일 되는 과정 중 일어난 이야기들이 소설의 소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보면 삼국지는 끝없는 전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전쟁을 계획하고 참전하고 거기서 승리하거나 패하는 내용이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슬퍼하는 가족들 그리고 처참한 살육전 후 살아남은 자든 죽은 자든, 승리자이든 패배자이든 간에 모두 전란으로 인한 상처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이 시대의 전쟁 안전 불감증에 걸린 신세대들은 각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는 군사적, 국가 외교적 혹은 기업의 경영에 있어서도 여러 방면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삼국지에서 형주나 서촉, 익주 등의 천하통일을 위해 유리한 지역을 서로 차지해 내기 위해 여러 번의 전쟁을 하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가 과거 식민지였을 때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이는 열강 세력들의 다툼을 연상케 한다. 또 이라크의 석유를 두고 벌이는 각축전이 떠오르기도 한다. 중국도 역시 과거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굴욕의 역사를 겪어야 했지만 지금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세계적인 부상국이 되었다. 혁명과 혼란 속에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있기 까지는 삼국지로부터 얻은 교훈이 중국인들의 사상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삼국지를 통해 보면 국가부강을 위해서는 군사력도 강해야 하지만 제갈공명이나 방통과 같은 책략가 또한 매우 중요하다. 적벽대전에서처럼 2만의 주유 군사가 80만의 조조 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연환계와 고육계라는 천재 지략가의 계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구도 중요하지만 쓸 만한 인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교육 혁신을 통해 인재 양성에 힘쓰고 인재 발굴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삼국지를 통해 제갈량 같은 천재 지략가일지라도 북벌에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역사중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강구해 현세에 있어서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는, 삼국시기의 많은 인재 배출 또한 소설 상의 특징적 인물을 묘사하기에 적절하다. 삼국의 장기적인 정치ㆍ군사 투쟁 중, 많은 정치가와 군사가가 한꺼번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철학가ㆍ문학가ㆍ자연과학가 등도 나타났다. 따라서 삼국은 정치ㆍ군사ㆍ경제ㆍ문화 각 방면에서 모두 뛰어난 진전을 보였다. 예를 들면, ‘조조(曹操)’는 삼국시기 정치무대의 뛰어난 대표라 할 만 하다. 삼국 형성 전, 군벌 혼전 시기부터 바로 그의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재능이 드러났다. 그는 각 방면의 조건들을 이용해 많은 군벌세력을 퇴치했고, 동한(東漢)이래 정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정치세력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폐단을 개혁했다. 또한 인재의 조직, 수력자원 축조 등 위나라의 건립을 위해 풍부하고 견실한 기초를 다졌다. 군사방면에 있어서는 ‘제갈량(諸葛亮)’이 가히 삼국시대의 전형이라 말할 수 있다. 촉나라 형성 후 그는 성공과 실패 또 승리와 패배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군사 재략가였다. 그는 그 유명한 ‘융중대책(隆中對策)’의 지혜로 유비를 도와 한 지역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맹획(孟擭)과의‘칠종칠금(七縱七擒)’에서도 모두 그의 비범한 군사 재능이 나타났다. 실제로 그의 군사 사상은 중국의 군사 사상 역사 상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철학방면에 있어서는 위나라가 가장 발전한 것 같다. 위나라는 청담현학(淸談玄學)의 풍조를 열었다. ≪노자≫, ≪장자≫와 ≪주역≫은 “삼현(三玄)”이라고 불렸는데, 당시 현학가들의 경전이었다고 한다. 문학ㆍ예술 영역에 있어서는 ‘조씨부자(曹氏父子)’를 제일로 꼽을 수 있다. 내가 아는 조조(曹操)는 하나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학가,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으로 단가행≪短歌行≫이 있는데, 이는 중국시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단가행’을 통해서 짧은 인생을 슬퍼하며 섬길 주군을 찾지 못한 젊은 인재를 모아 천하평정을 하고자 한 조조의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일찍이 노신이 조조를 일대“문풍 개혁의 대사”라고 평가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조조로 말미암아 실제 문학ㆍ예술영역에서 매우 큰 영향이 일었다고 한다. 조조의 아들인 조비(曹丕)와 조식 역시 문학발전에 있어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비의 ≪전초조문≫은 중국 현대 존재하는 제일 이른 문학 평론 전문 저작이고 조식의 오언시도 중국 시가의 발전에 새로운 내용을 주입했고,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한 당시“건안 7자”까지 유행했던 것을 보면 조 씨 부자의 문학가적인 또 다른 기질이 다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과학과 의학상 에서도 인재가 많았다. 장중경이 바로 당시 저명한 의학대사였고, 또 기계제조가 마균 등이 있다. 그들은 중국 과학발전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삼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각각 영역에 모두 휘황찬란한 성취가 있어, 이것이 유전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모두 계승 된 것이다. 이러한 인재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 나관중은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문체상의 허구와 과장이 가장 많이 돋보였다. 예를 들면, 조조의 키를 7척이라 하고 관우의 키를 8척~9척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관우는 184미터가 넘는 장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도 나관중이 꾸며낸 과장 일 것이다. 또 조운이 백만 대군을 뚫고 유선 아두를 구한 이야기가 실제로는 몇 십만도 안 된다고 한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백 만 대군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역시 실제 당시 인구와 비했을 때에 말도 안 되는 숫자이다. 이렇게 허구와 과장을 통한 인물묘사로 인해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중국인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고 더욱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는 인물들 각각의 특징이 부각되고 개성 또한 매우 뚜렷하다. 이러한 소설 문체상의 표현과 묘사가 정사와는 또 다른 흥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각각의 캐릭터가 분명하여 수백 명의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난잡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나관중 삼국지연의의 조조는 간사한 영웅의 기질이 다분하고, 관우는 멋진 무인의 기질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장비는 난폭하고 거친 인물로 표현되며 성질이 급하고, 제갈량은 천하제일의 기재로 묘사된다. 유비는 착하고 도덕적이며, 관대하고 우유부단하고 눈물이 많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지 정사와 삼국연의 소설을 비교해 보자면, 삼국지 정사에서 삼고초려는 유비가 천하대세를 묻자 제갈량이 삼분지계를 알려준 뒤 바로 출사한다. 하지만 삼국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천하 삼분지계를 말하자 유비가 출사를 권유하지만 거절한다. 그래서 유비가 눈물을 흘리고 울며 매달린다. 이때에 비로소 제갈량이 출사를 결심한다. 나관중은 일부러 유비가 우는 장면을 더해 나약한 유비의 모습을 그리고 속세에 초연한 제갈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인물 묘사 방식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내용의 재미를 더한 것이다. 이렇듯 삼국지는 보면 볼수록 빠져들게 되고 여러 가지 방면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중국은 마치 삼국지의 유비와 손권이 패권자인 조조에 맞서 동맹을 맺은 것과 같이 인도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소위 친디아라고 불리는 경제 협력자, 동반자의 길을 걷고 있다. WTO에 가입한 이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하나가 되어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보면 우리도 역시 분발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연의는 사실을 근거로 한 허구이기도 하고, 내용면이나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묘사에 있어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여러 방면의 교과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November 11 世界の中心で、 愛をさけぶ
我喜欢的电影。 며칠 전 우연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이 영화를 또 보게 되었다. 4년 전과 그 후에도 몇 번 봤는데 볼 때마다 느낌
이 틀린 영화다. 영화를 보며 느낀 건데 오오사와 타카오(大澤隆夫)는 언제 봐도 멋있다. 예전에 많이 좋아했던 mr.children
의 사쿠라이(桜井和寿)와도 조금 닮은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외형적 타입의 느낌이 대게 그런가 보다. 오오사와 타카오는
릴리슈즈, 하나와 앨리스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여태껏 동일한 사람인 지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느낌이 달랐다는 건가.
아무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이다.
November 09 阳光刺眼的下午
喝着一杯咖啡望窗外
天空上的一片云
像画一样漂浮着
不知岁月过得多快
一年比一年长大
要放手的比手里能抓的多
休闲的午后
心里的舒适中突然
到现在的时间般的一堆孤独冒出来
好像快眼泪也留下了
어느날 오후 풍경 - 윤동주
창가에 햇살이 깊숙이 파고드는 오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 한 점
그림처럼 떠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살아가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것보다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한가로운 오후
마음의 여유로움보다
삶을 살아온 만큼의 외로움이 몰려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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